인간적인 규모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한데 내게 남궁선 감독의 영화가 갖는 매력은 사랑스러운 멍청함이다. 그런 면모들이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힘을 낼 시간》도 아이돌 산업의 스펙터클 이면에 감춰진 연약한 인물들을 다루는 영화다. 그러니까 화려하거나 멋지게 담는 것은 안된다. 소위 있어 보이는 현장은 필요 없다.

적합한 카메라와 렌즈, 조명 장비를 구상할 때, 그리고 그것들을 다룰 사람 수와 구체적인 사람들을 떠올릴 때, 인간적인 규모에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촬영 감독은 영화의 규모와 방식을 설계함으로써 감독 못지않게 현장의 분위기를 크게 좌지우지한다. 이 조심스러운 기획의 단계에서 다양하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건축의 ‘Human Scale’이란 개념에 비추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 내가 맡은 건 며칠 만에 조회수 몇 억 개는 가뿐하게 돌파하는 요즘 K-POP의 이미지처럼 우뚝 솟은 초고층 빌딩이 아니라 누구나 안온감을 느낄 수 있는 소담한 주택 설계라고 생각했다.

좀 더 영화에 와닿는 기준점은 에리크 로메르가 그의 에세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에서 설명한 것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가 촬영감독과 작성하는 계약서에는 사용할 장비 규모와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제한한다고 한다. ‘간단한 80와트 전구 두 개, 작은 할로겐 튜브 그리고 알루미늄 반사판..’ 이런 식으로. 그 이상은 촬영감독이 쓰고 싶어도 거부한다. 이 사랑스러운 방식이 적용된 그의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내 나름대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이란 토대 위에서 그런 현장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인간적인 규모의 장비와 인원을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강한 조명은 2kW 잼볼이었고 그 외 1kW 텅스텐 하나, 650W 텅스텐 하나, 그리고 지인에게 빌린 (그래도 반세기가 지났으니까) 색상 조절이 되는 LED 벌브 네 개를 주로 사용했다. 잘 마른 참나무 장작도 많이 쓰고. 혼자서 운용할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카메라와 사진용 렌즈들을 조합했고, 모비처럼 거추장스러운 것보다는 단순하고 가벼운 구형 원핸드 짐벌을 사용했다. 300g도 안되는 초경량 렌즈들을 올려서. 예전에 사둔 4ft 4bank 키노 조명도 가끔 사용했는데 고대 유물에 가까운 장비를 꺼내는 순간 젊고 유능한 촬영팀과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지긴 했다. 거짓말하면 ‘거봐라, 키노도 쓰지 않았냐’고 나중에 들킬까 봐 일체 가감 없이 사실대로 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것들은 모두 장소의 분위기를 통째로 바꿔놓을 만한 힘이 없다는 점이다. 한 번에 모든 장비를 그러모아 쓴 장면도 없다.

전직 아이돌인 주인공 세 사람은 모두 힘없는 청년들이다. 응원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이들을 압도하고 싶지 않았다. 카메라가 다가가야 할 대상은 배우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캐릭터인데, 액션 콜이 떨어지는 순간 최성은-현우석-하서윤이 아니라 수민-태희-사랑의 위치에서 봤을 때 카메라를 포함한 모든 장비, 스탭들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을 상처 입힌 것은 바로 그 요란한 산업의 위력이었으니까. 배우들에게도 “메이킹 촬영 같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촬영, 조명, 그립팀은 현장에 나를 포함해 3명으로 유지했다. 카메라는 함께 여행 온 친구처럼 친근하고 유쾌하게, 어떨 때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또는 부모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들 곁에 다가가도록 신경 썼다.

Share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