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초기에는 가사에 나타난 것처럼 봄, 가을 장면만 있었는데, 조감독의 아이디어로 눈 내리는 장면도 찍기로 했다. ‘어차피 내년 봄까지 기다릴 거면!’이라면서. 내 손으로 지옥문을 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결정한 그 순간에는 감독인 나도 한 마음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며 들떴었다.

평소에는 눈이 펑펑 오면 그날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고 기억하지만 폭설주의보가 발령되는 날이어도 실제로 눈이 내리는 시간은 2시간 정도.(라는 걸 이 나이에 알게 됐네) 게다가 야간에 눈이 내리는 경우가 더 많아서 낮 장면만 계획하고 있던 우리 입장에서는 가면 갈수록 식은땀 나는 겨울이었다. 지난 겨울, 눈이 온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촬영했다.

12월에 풍경 이미지 촬영을 어느 정도 마치고, 1월 초에 배우 이영아 님과 촬영을 하는데 큼지막한 함박눈이 내리다가 엔딩 장면만 남은 상황에서 볼품없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아쉬운 대로 나머지 장면을 촬영할 수도 있었지만 지난 12월에 눈이 제법 많이 오기도 했고 당시엔 그 이후로도 눈 예보가 많았기 때문에 다음에 더 제대로 된 눈이 오는 날 근사하게 찍어드리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이게 웬 허세인가. 그날 뒤로 예보는 점점 바뀌고 밤에만 눈이 오거나 해서 초라해진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되지도 않을 인공 강설기 견적서를 열어보고 있거나 CG로 눈을 합성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안 찍은 건 엔딩씬이니까. 이 작업을 통틀어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장면이었는데.

엉겁의 시간이 지난 후(열흘인가 지나서) 다음 날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정도의 확실치도 않은 예보를 보고 성급하게 촬영을 감행했다. 갑자기 내일 모이자고 하니 촬영감독은 해외 촬영 중이라 올 수가 없어 직접 찍기로 하고. 다행히 1시간 반 정도 함박눈이 쏟아져서 남은 2컷을 무사히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이 지난겨울, 낮에 눈이 내린 마지막 날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배우 이영아 님이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을 찍던 촬영감독이 수천만 원 들인 미술 세트보다 낫다고 했고 정말로 그래서 현장에 있던 몇 안 되는 스탭들끼리 뿌듯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의 함박눈은 《답장》의 불꽃놀이 같은 요소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CG는 없다. 모두 카메라에 담긴 것들로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