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연계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유영국(永國): 무한을 걷는 사람〉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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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장에서 상영 중인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고, 이를 연출한 카스카(caska)의 김선혁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평생 자신만의 추상의 길을 걸었던 유영국, 그가 보았을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풍경과 그가 남긴 희소한 어록을 영상의 골격으로 삼은 시적 다큐멘터리입니다. 정형화된 평론이나 분석적 해설 대신, 그를 회고하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떠오르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다큐멘터리 상영 후 김선혁 감독과 함께 유영국의 삶과 예술을 영상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 담긴 숨은 이야기들을 펼쳐놓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거장의 발자취를 스크린과 대화로 깊이 있게 만나는 시간에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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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 개요
– 일시: 2026. 7. 24. (금) 17:00-18:00
–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지하 1층 세마홀
Q. 연출을 맡게 된 계기와 제작 과정의 첫인상이 궁금합니다.
A. 이번 프로젝트는 저에게도 굉장히 뜻깊고 행복했던 작업이었습니다. 유영국 작가님의 작품을 보는 순간 받았던 강렬한 인상도 있었고, 이후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한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학예사님과 첫 긴 통화를 하며 “이 작업을 저 혼자 진행해도 될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유영국 작가님 본인께서도 일생 동안 어시스턴트 한 명 없이 캔버스를 짜는 일부터 모든 과정을 혼자 완수하셨다는 점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인데요. 영상을 만드는 방법 역시 그분의 작업 방식을 닮아가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스태프가 많이 참여하는 현장이 되면 이미지 외적으로도 신경 쓸 요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만큼은 제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역할을 맡고 싶었습니다. 캔버스 틀에 못질을 하는 것처럼 지나치기 쉽거나 번거로운 과정이라도 손수 해내면서, 대략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오롯이 유영국 작가님의 삶과 예술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헤아려보고 싶다는 것이 저의 첫 의도였습니다.
Q. 전문가나 화자의 인터뷰 장면(화면) 대신 음성(오디오)만을 사용하신 연출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신 이유가 있나요?
A. 특정 작가를 다루는 미술 다큐멘터리를 보면, 보통 평론가를 비롯한 다양한 전문가들이 카메라 앞에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신 작가님 본인은 정작 촬영할 수 없는데, 작가가 아닌 다른 인물들의 얼굴이 영상에 등장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현장 스태프 규모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제가 바라는 연출 방향과 맞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음성 자체에는 그 사람의 얼굴이 담지 못하는 특유의 결과 질감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음성만으로도 그 이야기와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카메라를 앞에 두는 인터뷰는 배제했습니다.
대신 방배동 자택의 응접실에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장남 유진 선생님, 차녀 유자야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조명도, 카메라도, 스태프도 없다 보니 친밀감과 몰입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한 분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한 분이 웃으시며 반응하거나 내용을 보태어 대화를 이어가셨는데, 연출자인 저로서는 사전에 모두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던 만큼 무척 흥미롭고 값진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Q. 영상의 챕터를 나누는 기준과 전체적인 서사 구조는 어떻게 기획하셨나요?
A. 챕터 구성은 저에게도 아주 중요한 출입구이자 돌파구였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영상으로 다룰 때, 단순히 연대기 순(Chronicle)으로 구성할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시간 순서대로만 나열하면 연출자로서의 시선이나 아이디어가 담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으니까요.
다행히 이 고민은 전시를 기획하신 학예사님의 구성안 덕분에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1964년 유영국 작가님의 첫 개인전을 이번 전시의 도입으로 설정하셨는데, 그 기획에 이미 명확한 구조가 잡혀 있었습니다.
1964년은 유영국 작가님이 그동안 해오던 협회나 그룹 등의 대외 활동을 모두 정리하고, 오롯이 개인전을 통해 본인의 작품 세계를 발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해입니다. 작가로서의 면모와 결단을 드러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죠. 영상 역시 혼자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보다 그 서사의 바탕 위에 서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964년을 영상의 도입부로 삼고, 그 전후의 이야기들을 펼쳐내는 구조로 잡았습니다.
Q. 부제이자 영화 제목인 ‘무한을 걷는 사람(Walking into Eternity)’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A. 6개월이라는 제작 기간 동안 유영국 작가님을 끊임 없이 들여다보고 상상하면서,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정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그분의 ‘꾸준함’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작업 시간을 철저히 지키셨다는 사실은, 저 스스로가 굉장히 나태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더더욱 거대한 교훈이자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작 과정 중에 방배동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요. 그곳에서 굉장히 압도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공간에서 매일의 시간을 노동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노동자’라 칭하고, 수많은 작품을 그려내며 단 한 걸음도 후퇴하지 않았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술 평론가처럼 그분의 작품 세계에 담긴 ‘무한’의 함의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창작자의 시선으로 그 작업실에 서 보았을 때 그곳은 단순히 몇 평짜리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공간 자체가 이미 한계 없이 ‘무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한 번도 후퇴 없이 스스로 열어나간 무한의 공간과 시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던 한 인간의 엄격한 인상을 정돈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한을 걷는 사람》, 그리고 영어로는 《Walking into Eternity》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Q. 편집 과정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덜어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연출자로서 이 ‘덜어냄’의 기준과 가장 주안점을 둔 원칙은 무엇이었나요?
A. 질문에서 말씀해 주신 ‘덜어낸다’는 표현을 연출자 입장에서 조금 바꿔 말하자면 ‘꾸미지 않는다’ 혹은 ‘꾸밈없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반 공정에서는 그래픽을 넣거나 화면 합성, 생성형 AI 등 기술적인 재주를 부릴 수 있는 방법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유영국 작가님이 지닌 엄격함과 절제를 떠올려보면, 그분의 작품을 전달함에 있어 가장 꾸밈없는 형태가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단 측의 협조로 대량의 고해상도 작품 이미지를 취합했을 때, 작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모션 그래픽이나 화려한 효과를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촬영 앵글 역시 고정(Fix)된 상태로 담아냈습니다. 연출자가 무언가를 보태거나 꾸미려 하지 않고, 생애에 걸쳐 일어난 작가님의 작품 변모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연출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Q. 울진의 산과 바다 풍경을 담은 장면들도 돋보입니다. 현장 촬영 과정은 어땠나요?
A. 울진 풍경이 담긴 어록 장면들은 기획 단계부터 저에게 일종의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웃음) 이게 무슨 뜻이냐면, 앞서 말씀드린 ‘꾸미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다 보면 실사 촬영을 기반으로 한 영상 제작자로서 제가 가진 카메라를 다루는 기량이나 연출의 감도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거든요. 작품 이미지나 역사적 자료 사진이 나오는 시퀀스는 후반 작업 위주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작가님의 어록 문장들을 마주했을 때, 이걸 그저 인물 사진이나 작품 이미지 위에 얹어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보로서 쓱 읽고 넘어가기보다는, 관객들이 그 문장이 가진 힘을 가만히 느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화면에 분배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려면 그 시간의 흐름을 단단하게 받쳐줄 밀도 높은 영상 이미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작가님의 고향인 울진 풍경일 거라 단번에 떠올렸습니다. 제작자로서는 ‘아, 이 풍경만큼은 내가 정말 잘 담아낼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확신과 기대가 있었죠. 그래서 저에게는 마음껏 카메라의 감각을 펼쳐볼 수 있는 일종의 놀이터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울진 촬영도 가열차게 혼자 떠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웃음) 생전 영상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온전히 그 장소를 정서적으로 느끼고 반응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스태프나 촬영 감독이 같이 가면 ‘어느 숙소가 좋은지, 밥은 때 맞춰 뭘 먹여야 할지, 저 사람이 지금 배고프진 않은지’ 다른 고민을 하느라 공간에 집중을 못 할 것 같더라고요. 혼자 여행을 가본 게 한 20년 만이었는데, 목적이나 정교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이곳저곳 배회하면서 촬영했습니다.
울진은 단지 태어난 곳이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생계를 위해 울진에서 오랫동안 양조장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도 주기적으로 그곳을 오갔습니다. 그 반복되는 이동의 시간 동안, 평생 산을 그려온 화가의 머릿속에서는 ‘산과 자연’이라는 주제가 계속해서 새로 업데이트되고 다층적인 인상으로 쌓여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오가는 길 위에서 작가님이 마주했을 산과 바다의 풍경이 궁금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앵글이 예쁘게 잡혔다고 해서 단번에 촬영을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작가님의 시선이 시간과 계절에 따라 겹겹이 쌓여갔듯, 저도 이유 없이 다음 날 밤이나 해 뜰 때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고,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쏘다니며 시간대별로 변하는 인상을 찍어보았습니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산세를 넘어 고요하게 펼쳐지는 은은한 바다 풍경도 바로 그렇게 찾아온 우연의 선물이었습니다.
보통 그런 장면을 계획한다면 해가 선명하게 뜰 때나, 날씨 좋은 날 파란 하늘과 바다를 담을 수 있는 한낮을 촬영 시간대로 떠올리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정해진 스케줄표도 없다 보니, 오후 늦게 도착해서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가 아쉬운 마음에 답사 겸 야트막한 산에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가 봤습니다. 해가 질 무렵 드론을 띄워 찍어보았는데, 나중에 편집하며 보니 그게 해가 진 직후의 매직아워(Magic Hour)가 만들어낸 무척 부드럽고 추상적인 질감의 바다더라고요.
저희 다큐멘터리의 서사상 그 장면은 유영국 작가님의 타계 이후를 다루는 마지막 엔딩 시퀀스인데, 쨍한 일출이나 한낮의 풍경보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난 뒤의 은은한 풍경이 서사에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정교한 계획을 따르기보다 비워둔 상태로 찍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장면이라, 작업자로서는 운이 참 좋았고 쾌감을 느꼈던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Q. 다큐멘터리라는 매체를 작업하면서 느낀 개인적인 소회가 궁금합니다.
A. 긴 시간과 공을 들일 수 있다는 점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광고나 뮤직비디오는 이미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정답을 이야기와 스토리보드를 통해 밖으로 꺼내놓는 작업이라면, 다큐멘터리는 하나의 질문만을 들고 들어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내 안으로 받아오는 작업이거든요.
특히 이 작업은 어록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취합된 상태로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시와 영상이 동시에 준비되다 보니, 저뿐만 아니라 미술관 측에서도 새로운 어록이나 자료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수시로 공유해 주시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영상에서는 그 어록들이 곧 전체 서사를 받치는 뼈대이다 보니, 새로운 문장이 하나 발견될 때마다 영상의 흐름과 구성이 완전히 새로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어록 하나하나가 밤하늘의 ‘별’이라면, 새로 찾아낸 어록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구성되느냐에 따라 매번 완전히 다른 ‘별자리’가 그려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자료를 추적하고 태깅하며 구조를 새로 엮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작업자로서 참 즐거웠습니다.
질문 하나를 들고 시작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받아들이며 마친 작업이었기에, 마치고 난 지금은 시작하기 전보다 한 걸음 정도는 분명 앞으로 나아갔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유영국 작가님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대중에게는 아직 낯선 작가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인물로 기억해 주셨으면 하나요?
A. 저 역시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유영국 작가님에 대해 그렇게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분의 작품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계속 보아도 질리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뒤에 있는 인간적인 면모들을 한 번 살펴보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미 좋아하시는 작품이 있다면, 작가님과 관련된 서적들을 찾아 읽어보시길 꼭 권해드리고 싶어요. 책 속에 담긴 일화들을 접하며 작가의 삶에 관해 알아가고 다가가는 것은, 이미 좋아하는 그 작품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리서치 과정에서 만난 그분의 에피소드들에서 같은 창작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깊은 공감과 울림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었던 그 단단한 삶을 보며,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것처럼 “나 역시 뚜벅뚜벅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지키며 변함없이 이대로 걸어가도 되겠다”라는 작업자로서의 실질적인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눈앞에 또렷이 보이는 거장이자 아득한 대선배를 만난 것처럼요.
관객분들께서도 이 다큐멘터리 뿐만 아니라 관련 서적들을 접해보시면서, 그 단단했던 삶의 궤적을 딛고 서서 유영국이라는 작가를 더 깊이, 그리고 더 잘 사랑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