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거법

나에게 기획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다짐하는 일에 가깝다.

진부한 표현을 뜻하는 프랑스어 ‘클리셰(Cliché)’는 본래 인쇄 용어다. 식자공이 자주 쓰는 표현을 매번 조판하기 귀찮아 끈으로 묶어 손 닿는 선반 위에 올려둔 활자 다발을 의미한다. 특정 문구가 나오면 식자공은 이렇게 준비된 기성 조판을 통째로 끼워 넣는다. 독자 또한 익숙한 표현 앞에서는 식자공처럼 문장을 건너뛰며,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정리하는 것은 이 활자 다발의 끈을 풀러내고 표현의 양상을 해체해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발라드 MV를 만들고자 하니, 사실 매우 겁이 났다. 편한 수단에 길들여질 것을 경계하는 마음에 기획안 첫 장에 하지 않을 일들의 목록을 크게 써 내려갔다. (쓰다 보니 기둥에 묶여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오디세우스 같은 꼴이다.) 어린 감독이 뭘 하려고 할까 궁금해하며 이 기획안을 열게 될 김동률 선배님이 황당해하실까 걱정도 좀 하면서.

그때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퇴근길은 이 MV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육교 아래를 지나는데, 불꽃놀이 촬영을 며칠 앞두고 상상한 장면들을 어서 빨리 카메라를 통해 보고 싶어서 조바심 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결국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인가를 찾는 일이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니 조금 더 분명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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